선거제도- 프로이센 삼부제

-

1. 들어가며

오늘날 ‘1인1표제’를 민주주의의 상식으로 여기고 있다. 계급이나 재산, 출신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원칙은 역사적으로 자명한 것도,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한때 유럽에서는 경제적 기여가 정치적 권리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자산을 많이 가진ㅈ 이들은 사회에 더 많은 책임을 지며,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통념이 존재했다. 세금이나 재산 규모에 따라 투표권의 무게가 달라지는 제도는 이 같은 인식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제도 중에 구조적이고 조직적으로 불평등을 제도화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세기 프로이센에서 시행된 삼부제 선거제도(Dreiklassenwahlrecht)이다. 이 제도는 보통선거의 외형을 취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세금 납부액에 따라 유권자를 계층별로 구분하고, 각 계층에 동일한 비율의 선거인단을 할당함으로써 부유한 소수가 정치를 주도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였다.

2. 보통선거인가, 위장된 특권선거인가?

프로이센 삼부제 선거제도는 1848년 독일 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헌법을 통해서 1849년 3월 도입되었다. 당시 프로이센 정부는 형식적으로는 ‘보통선거’를 도입했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세금 납부액에 따른 계층별 투표권 차등화를 통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삼부제 선거제도는 프로이센 왕국 의회(Abgeordnetenhaus)와 시의회 선거에 적용되었다. 유권자를 납세액을 기준으로 세 계급(Klasse)으로 나누고, 각 계급은 동일한 수의 선거인단을 선출하고, 이들이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선거구(Urwahlbezirk)별로 선거인단을 3에서 6인을 선출하고, 여러개의 선거구 선거인단이 모여서 의원을 선출했다. 유권자를 세금납부액 순으로 정렬하고, 세액의 1/3까지 납부하는 사람들은 1계급에 1/3에서 2/3까지 금액을 납부하는 사람은 2계급, 나머지는 3계급에 속했다. 1 계급이 속하는 사람이 아무리 적은 수라도 1/3에 해당하는 선거인단을 선출하게 되어 소수의 자본가와 지주계급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반면 대부분의 시민과 노동자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1계급은 4~5%의 유권자가 해당되었고, 2계급은 10~15%, 3계급은 80~85%의 유권자가 해당되었다.

삼부제 선거제의 불평등성은 선거 결과에서도 나타났다. 같은 시기 프로이센 왕국이 속한 독일제국의 제국의회는 형식적으로나마 보통·직접·비밀·평등선거를 보장하는 단순다수 대표제로 채택하고 있었다. 물론, 25세이상 성인 남성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지고, 선거구간 특히 도농간 인구불균형이 심해 불비례성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프로이센 왕국의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산업화와 더불어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독일사민당(SPD)는 1903년 제국의회에서는 사민당은 31.7% 득표로 의석 20.4 %의 의석을 차지했지만, 프로이센 왕국의회선거에서는 1908년까지 원내진출을 못했을 정도로 불평등한 선거제도였다.

3. 크루프 한명이 도시를 대표했다?

이러한 제도의 실상은 당시 도시 정치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루르공업지대 중심에 위치한 에센(Essen)이다. 에센은 독일 산업화의 상징이자 철강기업 크루프(Krupp)의 본거지였는데, 이 도시에선 다음과 같은 말이 회자되었습니다

“에센에서 제1계급은 크루프 단 한명이었다”

이는 약간은 과장된 말이었지만 선거제도의 불평등성을 잘 나타내는 말이었다. 크루프는 지역 전체 세금의 상위 1/3을 혼자서 부담하고 있었고, 단독으로 1계급에 할당된 선거인단 단독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프로이센 Landtag 의원은 40~50개의 선거구 선거인단이 모여서 의원을 선출하기 때문에 1개선거구의 1/3의 선거인단을 뽑을 권한만으로는 의원선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불평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구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다만 크루프처럼 1계급에 해당하는 유권자가 1인인 선거구가 전체 22,749 개 선거구 중  2,283 개였을 정도로(1888년 기준) 아주 희귀한 사례는 아니었다.

4. 정치적 효과: 보수의 독점과 민주주의 지체

삼부제 선거제도는 형식적 보통선거의 탈을 쓴 계급지배 장치였습니다. 특히 이 제도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1) 보수주의의 장기집권: 프로이센에서는 융커(Junker)로 대표되는 지주계급이 의회를 장악했고, 자유주의·사회주의 세력은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2) 사회민주당(SPD)의 소외: 20세기 초 SPD는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표를 얻는 정당이었지만, 프로이센 의회에서는 거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함. 3) 정치적 불만의 축적: 대중은 정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이는 노동운동의 급진화와 계급갈등의 격화를 불러왔다. 4) 제도적 민주주의의 지체: 독일 제국은 형식적 헌법과 의회를 갖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봉건적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했다.

5. 유사 제도: 보통선거의 길목에서

삼부제와 비슷한 제한선거제는 19세기 유럽 여러 나라에 존재했습니다. 벨기에서는 자산이나 교육, 가족 상황에 따라 1~3표를 행사하는 복수투표제가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납세액을 기준으로 1~2%의 유권자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지는 제한선거가 시행되었다. 또 영국에서는 대졸자의 경우 옥스포드, 캠브리지 등의 대학선거구에도 추가 투표를 할 수 있었고, 일정 금액이상의 부동산 소유자는 부동산 소재지 마다 투표권이 주어지는 복수투표제가 있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대지주쿠리에, 상공인쿠리에, 도시민쿠리에, 농민쿠리에 등 쿠리에로 나누어 의원을 선출하는 쿠리에선거제도가 있었다.

이러한 제한선거제도는 보통선거로 나가기 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졌으며, 일정기간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성공했다.

6. 나가며

삼부제 선거제는 1918년 독일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과 함께 폐지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보통선거를 가장했지만, 실제로는 재산, 계층, 납세능력을 기준으로 한 정치적 특권 제도였고, 보통선거의 길목에 나타났던 다른 제한선거제와 비슷한 과도기적 선거제도였다.

Share this article

Recent posts

Google search engine

Popular categories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

Recent comments